사도행전 15 : 36-41
제가 프랑스에 왔을 때 놀란것중 하나는 프랑스 교육체계가운데 동양의 역사가 매우 적게 가르쳐진다는 것이었읍니다.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이 극동 나라들의 역사는 고사하고라도 그 이름도 채 모르고 있었읍니다. 그들이 근시안이라다라든가 자기중심적이다라고 판단할 필요없이 프랑스인들은 이 나라들의 역사를 알 필요가 없읍니다. 사실, 선진국 백성들은 저 개발국의 극동 나라의 역사를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동양이 잘 살고 서양이 못산다면 그 결과는 동일할 것입니다. 근자에 저는 중학교과 과정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밀려난다는 기사를 읽었읍니다. 문교부에서 제시한 그 이유인 즉슨 세계화의 추세에 맞추어 중국의 역사에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이었읍니다. 이것이 그나라의 경제진보를 위해서는 아니면 경제 전쟁에서의 생존을 위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세계화의 현실에 해당합니다. 요약하면, 이 역사의 조정은 현세계화의 추세에 비하여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이 됩니다. 반대로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는 중학교 이후 역사 공부는 동양사와 서양사의 동일한 양분으로 진행됩니다. 이 역사학습은 어떤 의미에서 당위성 아니면 필연성으로서 그이유는 후진국 (1980년 이후 개발도상국으로 불리워 짐) 이 선진국과 같이 사회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고자 그것을 배우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기합시다. 이 세상의 어떤 나라의 역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강대국에 해당하는 5 부분으로 이루진 다니엘의 신상 – 금의 머리, 은의 팔과 가슴, 동의 배와 허리, 철의 다리 그리고 철과 진흙이 합성된 발 – 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한 돌에의해 박살이 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세상의 마지막 때의 역사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역사안에는 전쟁의 역사가 포함됩니다. 아니 우리는 세상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타락한 세상에 사는 고로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입니다.
사실, 전쟁은 사탄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적에 의해 개시되었읍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단의 음성을 들은 때부터 항상 사람들 사이에는 적의가 존재했읍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항상 전쟁을 유발합니다. 전쟁은 일종의 악입니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지요. 전쟁은 피해야할 것이나 전쟁은 필요악이라고도 할 수 있읍니다. 독서를 좋아하는 한 주의 종이 있었읍니다. 유명한 영국 크리스챤 역사가 시 에스 루이스의 책을 읽는 도중 그는 그가 쓴 전쟁에 대한 한 대목을 읽게 되었읍니다. 그의 이론은 전쟁이 비록 세상에 극대한 손해를 입히나 그것은 필요악인 바 그것이 없으면 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인생의 허무한 쾌락안에서 자신을 망그러뜨릴 것이라는 것이었읍니다. 이 고난의 때를 겪으며 수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될것입니다. 이 설명은 이 종에게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이 발견에 기뻐서 깜짝 뛰었읍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감추어있는 많은 진리가 있다는 것과 우리가 이 진리를 열심히 그것이 독서나 설교강의나 종에의 조언이나 등을 통하여 구하여 져야 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진리의 발견을 도와주기 위해 우리의 방의 문을 두드리져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내면 가운데 일어나는 질문에 대한 이러한 진리가 발견되어질 때 우리는 참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제가 어쩌다 이른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진리를 전심으로 찾으면 우리는 그것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양을 향해 동양을 향해 뛰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대해 등을 긁는 것과 같은 가장 합당한 답으로 우리를 만족시켜주실 것입니다. 답은 반드시 성경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서류에서도 답은 있읍니다. 프랑스인들이 그곳에서 몇가지 답을 찾기 위해서 중국에게 눈을 돌리고 싶다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렇게 찾아서 뭐해 한번 말씀 듣고 내 일에 성공하고 장래보장되면 그것으로 족하지 한다면 문제는 다르지만 그렇지 않고 혹자가 의미가 풍성한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다르게 행동할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아직 전쟁이 사단의 작난이라는 것을 모를 때 저는 컴뱃이라는 미국수입의 테레비 드라마 연속극을 보기를 좋아했읍니다. 그 내용은 미국 병사들이 적군 독일 나치인들과 싸우는 것인데 감명이 있었고 또 빅 모로의 명연기가 내 인상에 많이 남았읍니다. 사내아이들은 전쟁 영화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느정도 남성다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쟁 지휘에 있어서 항상 전략이라는 것이 있고 이 전략이 곧 승리로 이끄는 주 열쇠가 됩니다. 전쟁사에 있어서 손자의 저서인 병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요한 전쟁 매뉴얼이 되었읍니다. 저자가 이 저서를 시작하면서 하는 몇마디는 다음과 같은데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 전쟁을 이기고 지는 것은 절대로 우연으로 되지 않으며 신이나 영의 간섭에 의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방법과 전략의 문제이다. 좋은전략적 법칙은 승리로 인도한다. 그것을 잘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리스도인들은 물리적인 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물리적인 생활이 없는 듯해 보인다. 이것은 종종 이단의 성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 순전히 영적인 측면을 갖는 것들이 있는 한 편으로 순전이 물리적인 측면을 갖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투는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영에 대한 전투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사단으로부터 온것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이라는 육이 있어야 하고 또 육인 사람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나의 요지는 전쟁 수행을 위한 영적인 법칙이 있는 것과 같이 전쟁에서 존중하여야 하는 물리적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이것이 손자가 그의 저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영적 법칙을 보자. 성경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백성안에 죄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여호수아 시대에 그는 출전전에 청결함을 선포하였다. 이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것이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선민은 이를 잊고 40년 광야생활 동안 이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예식은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난공불략의 여리고 성을 7일간 돌면서 믿음으로 도전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잔 다르크가 영국군을 무찌르고 프랑스인들을 포위된 오를레앙으로 부터 구원코자 왔을 때 그의 존재가 주는 프랑스인들의 충천한 사기는 그들이 승리를 거두는데 필요한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소위 받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신탁에 의존하되 또 하나님의 덕목을 군대가운데 실천하도록 도왔음을 보게된다. 그래서 군대가 거주민들의 닭을 훔치거나 그것으로 배불리 먹어서도 않된다고 했다. 그리고 창녀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패전의 근본 원인으로서 그를 멀리하라고 했다. 그리고 또 종교 축제일들을 잘 지키도록 권면했다.
손자의 병법을 다시 보자.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용이 될 만한 진리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것을 유일하게 영적인 관점으로만 보든 대신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양분화 할 필요가 있다. 순전히 물리적인 것들이 있고 이것이 전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한 단순한 예를 들자면, 평소에 전투 연습을 잘하면 전투에서 승리할 승산이 커진다.
손자는 장군의 재질로 5가지를 드는데 다음과 같다. 지혜, 공정성, 인간성, 용맹 그리고 엄격. 만약 우두머리가 지혜가 많다면, 그는 상황의 변화를 알고 신속히 대응할 것이다. 만약 그가 공정한 우두머리라면 그의 신하들이 보상과 벌에 대해 잘 알것이다. 그가 인간성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감정을 나누고 또 그의 일과 수고를 잘 평가할 것이다. 그가 용감하다면 적절한 때를 주저치 않고 간파하여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그가 만약 엄격하다면 군대들은 잘 훈련을 받아 그를 두려워하며 그 벌을 무서워할 것이다.
구원을 받은 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소환되었다. 이 영적인 군대는 여러가지 면에서 세상 군대의 성격을 닮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군대라 부르지 않았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군대는 세상 군대와 다르다고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사심을 받았고 주예수는 친절하고 사랑이 많기 때문이다. 이 논거는 전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인게이지 할때 이 논거는 그 유효성을 상실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 군대의 엄격성에 더 가까와 진다. 왜냐하면 두 쪽다 동일한 주제 « 죽지 않으면 살기 » 라는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러한 주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음 사람들로 칭송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한 시기가 지난 후 그는 성경의 장에서 사라졌다. 그의 이름은 바나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살펴보고자 순례를 하자고 했을 때 바나바는 그들의 선교여행에 동행하고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사실, 때는 제 2차 전도여행의 시발 때였다. 우리는 종 바울이 그의 첫 여행의 출발점이던 안티옥에 도착하였을 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성도들을 보러가자고 제의 하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가 특별히 역동적인 사람이라 조금도 어느 한 구석에 앉아 있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인가 ? 손자의 이론에 따르면 바울은 지혜로는 지도자 였다. 왜냐하면 그는 상황의 변화 다시말해서 그의 첫 전도후에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 막 우상의 껍질에서 나온 이 개종된 신자들에 대하여 사단의 공격이 열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바울이 즉시로 다시 출발할 것을 제의하는 것이다. 시간이 급박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한 사람을 보게된다. 성령은 항상 출정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와 같다. 나는 요새 어떤 한 그리스도인의 지각 습관의 원인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 성령의 존재를 깨닫지 못함이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이 구원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성령이 그 안에 거주한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함으로 그는 그를 다시 부를 필요가 없다. 단지 그는 그가 나오셔서 활동하시기를 요구하면 된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다. 우리는 미신을 믿듯이 그를 부르기 위해서 노래하거나 춤을 출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가 부를 때 언제든지 우리를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계시다. 이것은 마치 성경선생이 매 성경 공부를 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바울 안에는 성령이 충만함으로 시간은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결정하였고 나아 갔고 성령은 그를 도와 재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위 동역자라는 사람은 그의 바퀴에 쇄막대기를 넣었다. 바나바는 그의 조카 장 막의 동행이라는 논거를 제시하였다. 바울은 그의 답에 관한 한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아니다 였다.
그의 저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자는 긴급상황에 대해 대충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 군대가 뒤에 많은 도시를 남긴채 적진에 깊이 침투한 경우 그는 심각 영역에 놓이게 된다. 매복을 쉽게 놓을 수 있고 완패를 당하게 되기 쉬운 경우 이름하여 포위 영역에 놓이게 된다. 이는 또 사망영역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사망 영역에서는 나는 그 안에서 아무런 생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군인들은 천성상 그들이 포위되면 저항하고 아무런 다른 방안이 없으면 싸우고 사면 초가일 경우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군대의 침투경우 일반적으로 붙잡아야 할 법칙은 일단 적의 영역으로 깊숙히 들어간 경우 군대는 혼연일체가 되며 어떤 방어해야할 국가도 그를 이길 수 없다. 다시 말해서 « 군대를 출구가 없는 난공지경으로 몰아라, 예를 들자면 죽음앞에 두면 그들은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죽기로 각오한다면 어떤 업적도 불가는 하겠는가 ? 그들에게 어떤 가능한 후퇴도 없다면 그들은 요지부동이 될것이다. 그들은 서로서로 연대감을 갖고 다른 해결책이 없는 그 곳에 그들은 적과 육탄전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
바울의 첫여행은 더베에 이르는 2000 킬로미터의 길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제 2차 전도여행은 4000 킬로미터 에 이르고 아가야의 고린도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손자의 용어에 의하면 사망 영역에 해당하는 영역이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처음에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하간 그는 이 여행이 어려운 여행이 될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사단의 방해는 대단할 것이다. 어떻게 한번 군대를 탈영한 병사를 다시 데리고 어 어려운 길을 간단 말인가 ? 대답은 명료했다. 마가는 전쟁에 필요한 훈련을 받고자 안디옥에 남아 있어야 했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바나바의 대하여 혹자가 말하듯 갈라디아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도착했을 때 이방인들과 같이 먹던 자리에서 베드로와 같이 일어난 일로 인해서 생긴 원망심 때문도 아니었고 어린 장 막을 그가 도주하였다는 이유로 복수심때문에 이 생각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사단의 집요함 가운데 죽느냐 사느냐하는 전쟁에 출전코자 출발하는 지점에 있었다. 영역은 사망이라 불리고 출구는 없다. 와해된 합심은 치명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종이 나를 선택하느냐 안하느냐는 개인적인 감정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한 전쟁의 총 사령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떤자가 선택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유기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게 그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신다. 선택되어 졌다는 것은 이곳에서 가시와 덤불사이가 많은 길 위에서 냉혹한 고통을 겪게 된다는 설명이상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방법대로 장 막이라는 사람을 쓰시는데 그것은 그의 아저씨와 그의 고향이 시프르스 섬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게 된다. 그 후 마가는 그의 은사를 좋아 베드로의 서기로 택함을 받고 첫 복음서인 마가 복음을 쓰게 된다. 그의 복음은 짧고 그러나, « 곧, 또, 다음에 » 등과 같은 표현의 반복으로 인하여 역동적인 복음서로 간주되고 그가 첫 실수를 만회한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주저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마 혹자가 말하듯이 그가 어머니의 과잉 보호 속에서 자란 사실 때문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점진적인 훈련을 통해 그는 하나님을 위해 역동적이고 무엇보다 크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서신중 하나의 마지막에 그 당시 감옥에 있던 바울은 마가와 같이 오도록 권유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도에게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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