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 :9-19
프랑스와 한국의 교육제도의 차이는 프랑스에서는 세가지 바칼로리아 L (문학), ES (사회과학), S (과학) 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두가지 L 과 S 두가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문과 생이었읍니다. 비록 점수가 중간이상을 능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문학비평을 작성하는데 고생을 하였지만, 저는 문학을 매우 좋아했읍니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저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이 취미를 통해 인도한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프랑스 문학또한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에 저는 그 절벽으로 유명한 에트르타라는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읍니다. 그것은 모파상의 저 유명한 소설 « 여자의 일생 » 에 나오는 장소입니다. 내가 함께 여행한 저의 아버지는 이 프랑스 경치의 장엄함에 매우 감동을 받았읍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귀족출신의 처녀가 한 귀족 청년과 함께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의 꿈은 그 신랑이 난폭한 것을 발견한 첫날 밤에 깨어졌읍니다. 그리고 그의 환멸은 그의 사람이 난봉군임을 발견하면서 점점 더 커져갑니다. 그녀는 그의 남편이 서거후 그의 아들에게 집착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아들이 커가면서 가출하고 또 문란한 인생을 삶으로 실망합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한 신부가 개와 그를 끄는 아이들을 난폭하게 다룸으로 인해 쟌느가 더 이상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았읍니다. 그리고 그가 그의 남편의 간음사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었던 데도 이유가 있었읍니다. 하여간, 그와 하나님의 종간의 관계는 이로 끝나게 되었읍니다. 끝에 그는 그의 하녀가 그의 아들이 병들어 누워있는 파리로 가서 그가 맡기고자 하여 데리고 온 그 손자를 품에 않고 이 마지막 말을 합니다. « 인생, 여보세요, 그것은 그렇게 생각만큼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랍니다. »
저는 이 고백에서 한 위로를 찾아나서는 한 여인의 심정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비록 그가 하나님을 떠나 멀리 유랑하는 생활을 하였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한 위로를 선사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귀족 신분에서 그리고 그의 이상적인 꿈에서 전락하였을 지라도 완전히 전락하지 않았읍니다, - 이 점은 비록 이것이 소설이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또 그는 절대로 영혼의 한과 비통함의 극치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치로 같은 이름 « 여자의 일생 » 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명명한 프랑스 여자 정치가 시몬 베일은 그 자서전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 나의 생일에 27명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모일 것이다. » 그 어린시절이 유대인으로서 아우스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고 거기서 어머니가 숨지고 아버지와 오빠는 어디로 끌려가 더 이상 보지못함으로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 이 여인에게서 우리는 그의 영혼의 쓰라림이 얼마나 큰가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후손을 통해 그리고 그의 국가의 영예를 통해 그를 위로했읍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영혼의 쓰라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고 그들에게 사막의 비와 같은 그의 위로를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좋은사람위에와 같이 나쁜 사람위에도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입니다.
우리 이 아침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이 신의 위로를 가장 많이 누리는 혜택자입니다. 대강, 그녀는 불임여성이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사무엘이라 부르는 아들을 허락함으로 위로했읍니다. 그것이 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야기의 세목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은 그를 드러내시고 또 그는 이 헐벗은 여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읍니다. 그 결과 그에게 부여된 신의 위로는 특별한 위로였읍니다. 사실 그것은 축복이었읍니다.
이 이야기가 벌어지는 때는 어려운 때였읍니다. 보통 사무엘서와 사사기는 저자가 사무엘이라고 알려져 있읍니다. 사무엘은 한편 첫 왕 사울이 등극하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읍니다. 사사의 시대는 어두웠읍니다. 300년 이상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반대로 가나안의 우상과 손을 잡았읍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부와 문화를 부러워했읍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무법적이 되고 거칠어졌으며 그래서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한 선지자가 간음한 그의 부인을 찾아 돌아오면서 그럴 악한들의 강포에 내버려 두었고 집에 도착하여 반 죽음된 그 몸을 동강내어 전국에 발송한 사건이 터집니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의 원인은 이 책의 마지막 다음과 같은 몇마디에 소개됩니다. « 이 때에 이스라엘에 아무 왕도 없었다. 각자가 자기 좋은 대로 행하였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읍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 왕을 그들의 시스템에서 추방함으로 그들은 이 무정부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봅시도. 백성들이 정말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였읍니까 ? 모두가 불법적이 되고 간음자들이 되었나요 ? 우리가 사무엘 서의 처음을 보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읍니다.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았읍니다. 그러나 조심하세요 !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그들이 그를 찾았을까요 ?
사무엘의 한 중요 귀절은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를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읍니다. 삼상 3 :1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시스템이 있었읍니다. 그안에 세움받은 종들이 있었읍니다. 그에 순종하는 신도들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에 있읍니까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읍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씀의 희귀하여짐은 한 나무의 둥치를 자르는 것과 유사합니다. 보이는 푸른 바깥 모습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생명의 부재로 인해 죽었읍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자의 상태로 전락했읍니다.
경제학은 두 탐구분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미시경제학으로 경제 주체들 말하자면 가구, 소비자, 기업- 중소 규모든 대 규모든 - 들의 행위에 중점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시 경제학으로 두가지 축, 생산과 화폐을 두축으로 움직이는 나라의 전반경제의 기능을 다룹니다. 현재 세계 경제의 위기는 모두가 알다시피 subprime이라는 가구의 그 가택 구입을 위한 나쁜 행위가 은행 융자와 얽매이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미시경제는 거시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나라또는 한 백성의 영적 건강상태는 그것을 구성하는 가족, 신자개인, 경제단위등 « 영적 주체 » 의 좋은 건강에 달려 있읍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를 모면할 수 없읍니다. 종교계에 부패가 존재할 때, 위기는 내다볼 수 있읍니다. 백성들의 신앙이 형식적이되고 위선적이 될때, 위기는 기정사실입니다.
어떻게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낼까요 ?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이 가차없고 얽히고 섥인 위기 – 왜냐하면 그것은 구조적인 것으로 모든 사회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음으로 - 에서 구원하기위해 일하실까요 ? 하나님은 그 백성의 치유를 위해 한 사람을 일으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항상 한 사람을 통하여 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4세기 초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우스 는 그리스도 교인에 대하여 그 기간이나, 난폭함에서는 그것의 체계적인 적용의 면에서 전례없는 핍박을 가했읍니다. 인간의 견해로 보면, 이 때, 모든것이 끊난것 같았읍니다. 15년 이후 콘스탄틴 대제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그후 그것을 국교로 선포하였읍니다. 한 사람이 이 사건들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고 또 핍박받는 자들의 수호자로 자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기독교 이단인 아리안 파들의 물결앞에서 한 사람 클로비스가 서양의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는데 충분하였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두 그리스도교 역사의 위인들의 배후에는 여인들이 있었읍니다. 첫 사람의 여인은 헬레나, 비티니아 출신의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도 둘째 사람의 여인은 그 유명한 황후 클로틸드였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무엘이라고 하는 한 사람 아니 한 아이를 이스라엘 나라를 불법과 부패에서 구원하기 위해 일으키셨읍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배후에는 이 겸손한 여인 한나가 있었읍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가정의 불화로 부터 시작합니다. 일명 엘카나라는 사람이 두 여인을 두었는데 그 첫째는 한나였고 둘째는 페니나였읍니다. 페니나는 아이들이 많았고 한나는 아이가 없었읍니다. 전자는 후자를 조롱했고 그를 번민 시켰읍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격동한 적도 있었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불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고 그에게 페니나와 그 자식에 비해 갑절의 몫을 주었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읍니다. 한나는 상처를 입었는데 우선은 그의 경쟁자 페니나로 인함이요 둘째는 하나님으로 인함입니다. 그는 이것때문에 오랫동안 울었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만약 하나님이 비통한 한 영혼을 위로하신다면 이 비통한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경쟁자의 재앙을 보내어서 한나의 영혼이 충분히 비통에 잠기도록 하셨읍니다. 만약 한나가 이 대적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그의 자상한 남편의 한량없는 선행에 둘려싸여 있었다며느 이 영혼의 쓰라림이 있었을까요 ? 틀림없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자극하고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서 힘든 노역으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쓰라림이 마음속에 깊이 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대적으로 빚어진 번민은 비록 참기 힘든 것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 최종착지인 신의 위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한 과정에 불과했읍니다. 우리는 번민의 원인이 우리 자신이 아닐 수 있다면, 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위에 떨어지난 환란을 향해 이러한 견해를 주시길 ! 악은 종종 그 이후의 선의 예약입니다.
한나는 무엇을 했나요 ? 그는 엘리 제사장이 거처하는 실로에 있었읍니다. 그 앞에 앉아, 영혼에 쓰라림을 가지고 울며 기도하기로 한가지 서원을 했읍니다. « 만약 하나님이 한 아들을 주시면 그가 그를 그에게 돌려 주겠노라 ». 이 한나의 서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대부분의 종교 현상을 연구하는 철학자나 신학자의 경우 그들은 믿음이 경험하는 하나 또는 여러 기적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분석은 이 한나의 서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나는 그에게 한 아들이 허락되는 한 하나님을 섬길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보상이 어떤 신앙의 출발점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디아스 포라의 신도들이 그들의 환란 가운데에서 기뻐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일에 성공하게 되면 그 결과를 주님께 바치리라 아니면 그 수입의 일부를 주께 바치리라고 생각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고 서원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대적으로부터 연유된 현재의 고난은 한나로하여금 이 거래의 조건과 같이 보이는 서원을 하게끔까지 인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전혀 그의 기도를 들어야 한다는 구속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서원이후 한나의 마음 안에는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더 이상 그 영혼안에 원통함을 느끼지 않았읍니다. 그 결과 16절 후반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 이것이 단지 하나님의 종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그의 근심과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읍니다. 여기서 한나는 조용한 믿음을 얻게되는데 이것은 철학자들의 분석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한 믿음이 아무 보상없이 생겨날 수 있읍니다. 이 서원이후에 한나의 내면에 일종의 파라다임의 변화가 일어났읍니다. 영혼의 원통함에 자극을 받아 그녀는 지금까지 대적의 악에 대한 반발이 될것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매달렸읍니다. 그러나 지금 한나는 바뀌었읍니다. 그녀는 모든 그의 감정에서 자유로와 졌읍니다. 그녀는 그의 자식에대한 애착에서마저도 자유로와 졌읍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드렸읍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그의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 유리하게 역사하였고 그에게 아들을 허락했읍니다.
한나는 겸손한 여인이었읍니다. 그의 속삭임은 그를 나쁜 여인으로 간주하는 종으로부터 잘못 이해되었읍니다. 엘리의 인정도는 백성들 가운데 그 아들 불량 제사장으로 인하여 좋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엘리는 종과 부딛히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겸손하게 순종했읍니다. 엘리는 그녀를 축복하고 보내었읍니다. 한나의 마음은 모가 지지 않고 비단과 같았읍니다. 너무나 비단과 같아 그것은 악한 제사장의 마음을 움직였읍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게 하였읍니다.
결국, 엘카나는 한나와 동침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를 기억하셨고 그녀는 아이를 낳고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읍니다. 자 이제 끝맺기 전에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심령에 애통함이 있어면 하나님이 그것을 무시치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틀림없이 기억하시고 우리를 방문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원통함과 번민함을 줄 수 있는 천만번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지나쳐 우리의 현재 상황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혼수상태 이고 이것이 오늘날 번영의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줄 수 없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번민하여 원통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것을 주님께 맡기도 우리의 인생을 그분께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풍성한 자비를 좋아 우리가 원하시는 것을 내려 주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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