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믿음
막 4 :35-41
탈 기독화가 깊이 진행된 서양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불신의 물결이 우리에게는 걷잡을 수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 신부는 이 물결을 생각할 때 너무나 두려움을 가져 이 물결을 폭력적인 새 무신론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말이 나서 말이지 저는 그것이 시사문제이기 때문에 베누아 16세 교황의 페도필리에 관한 최근 말을 논평하지 않을 수 없는 바 그 내용인즉은 그것에 몰입한 사람은 병자이고 그들은 자유의지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들의 범죄성을 제외하였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반성경적이다. 과거 믿음의 교리 위원장으로서의 타이틀은 아무것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지식은 성경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성경은 자유의지의 마비를 죄라고 정의하지 병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고린도서의 짧은 독서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한다. 그의 실망적인 논조는 나로하여금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았도다 »의 말씀을 생각나게 할 뿐이다. 저는 저의 말이 성경적 진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계속 말을 하고자 하는 바는 그가 어떤 민족 – 영국 민족을 이야기 합니다 – 이 귀족적 민족이라는 말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눈에는 이 용어가 그들의 입속에 있을 수 있으나 어디에 귀족이 있는가 ? 고린도 1장 2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하나님의 종은 인기를 필사적으로 얻고자 하는 스타가 아니고 그 말과 행동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종이다. 어떻게 다시 페도필에 관하여 이 병자들이 그들의 인격을 그들 자신들로 부터 보호하여야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 이것 또한 확실히 반성경적인 언사이다. 만약 이들이 이 말과 같이 병자라고 한다면 그들이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 나와야 한다. 이 말들로 부터 제가 꺼집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종의 입이 정확하지 않고 매우 자주 사용되어져야 할 이 단어 : 죄 와 주 그리스도를 입에 담는 것이 매우 꺼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높은 교계제도상의 위치에 있고 또 수많은 성도를 그 밑에 두고 있을 경우 무슨 말이든지 얼마나 하기가 어렵겠는가 ?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 이 작은 종은 그와 의견을 달리한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 일요 설교를 이용하여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제가 전쟁을 앞에 둔 바울이었던 지난 주 메세지에 이어 저는 저의 설교를 전쟁에 관한 조그만 사려로 시작하고자 한다. 저의 견해로는 이 사려는 오늘 주제인 항해하고도 연관이 된다고 생각한다. 군대 단위의 하나중 중대 (compagnie)가 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군인들은 한 배위에 탑승한 사람들과 같다.
만약 손자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 군대를 출구가 없는 난공지경으로 몰아라, 예를 들자면 죽음을 앞에 두면 그들은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죽기로 각오한다면 어떤 공과도 불가능 하겠는가 ? 그들에게 어떤 가능한 후퇴도 없다면 그들은 요지부동이 될것이다. 그들은 서로서로 연대감을 갖고 다른 해결책이 없는 그 곳에 그들은 적과 육탄전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전투에 적용할 수 있는 군사 정책에 대하여 많이 배울 수 있을 지라도 우리는 그의 생각이 두려움과 협박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라면 적에 대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에 기초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탄을 미워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을 사랑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같은 영으로 같은 사랑으로 연합하여야 한다.
제가 라이얀 병사를 구해야 한다 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 중요한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 줄거리는 한 중사가 그의 직속 상관으로부터 그의 세 형제가 동일한 전투에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비심의 동기로 그를 군 복무에서 면제하여야 하겠다는 장군의 명령하에 한 라이얀이라는 병사를 찾는 특별사명을 받게된다. 그런데 그가 낙하병으로 어디에 존재하는지 모르는 상황하에서 그를 찾아 헤메게된다. 어떤 한 병사와의 밤 늦게까지의 대화에서 이 중사는 고백합니다. « 내가 이때까지 93명의 병사를 잃게 되었지만 모든 것이 위대한 일을 위한 희생이었기에 명예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의 군사들이 이 사명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볼때 공허하다. 왜냐하면 완전히 무익한 것을 위해 내 사람들을 희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인은 항상 그가 하고 싶은 것 그의 명예가 되는 것을 위해서만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종류의 전투를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군대에 소속된 한 멤버이며 상관, 즉 이 영화에로 말하면 장군의 명령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사가 결국 라이얀 병사를 찾았을 때 기뻤으나 이 기쁨은 잠시일 뿐 그 즉시 사라졌다. 그 이유는 라이얀이 장군의 명령이라 할 지라도 그 중사를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지극히 합법적인 것인 것은 그가 이 명령을 직접 받지 않은 상사 의 명령아래 있기 때문이다. 중사의 결정은 무엇인가 ? 그는 사명을 완수했다. 그리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이얀과 같이 남았고 그를 구원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자면, 중사는 그를 안전한 항구에 인도하기 위해 같은 배를 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일군 군사에 의해 모두 몰살을 당하고 라이얀과 그가 속한 군대 군사중 몇명만이 구원군에 의해 구조되게 된다.
군대가 적군이 다가올 때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들으면서 기다리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는데 음악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이제는 라이얀 군사와 생사를 같이 하고자 같은 배를 탔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중사가 전쟁에 있어 한 발 적극적인 발을 내디뎠다는 것이다. 그는 영웅인바 그것은 이 사명의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군사를 희생하고서라도 세 형제를 잃은 라이얀 병사를 면제시키고자 하는 장군의 스피릿을 영접한 것이다. 프랑스 격언에 « 노블레스 오블리지 ( noblesse oblige) » 가 있듯이 그의 고결한 명분이 중사의 발을 묶었다. 이것은 참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군대에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류의 고결하고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하나님의 군대안에는 용감한 군사정신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러한 공동체 믿음이 그로하여금 승리로 이끌게 하는데 필수적이다. 군대가 이 공동체적인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자마자, 다시 말해서 각자 자기를 위해 라는 식 –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역사의 섬김가운데 이러한 세상적 철학을 채택한다 – 이 군대는 가깝든 멀든 패배로 치닫게 된다.
오늘 아침 텍스트의 첫 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언어학적 조그만 관찰을 적어보면 여기서 프랑스말로 « passons » (가자) 는 영어로 « Let’s go » (가게하라) 이다. 이 영어적 표현은 프랑스 말로 직역하면 « Laisse-nous aller » 이다. 왜 이 영어적 표현이 생겨났을까 ? 정확하게는 몰라도 이 말은 우리에게 모세가 바로 앞에서 한 말 « 우리를 가게 하라 »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출발을 위해 붙잡고 가로막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탄 ?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람 안에 있는 그 어떤 막고 가로서는 힘을 이야기 한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기의, 그리고 편견등 이들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요인들이다. 그러므로 2명 3명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이러한 보이지 않는 그들을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힘이 있다. 예수님은 이것이 극복될 때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
예수님이 « passons » 이라고 이야기 할 때 이 첫 주석으로서 그가 그 병사들로 하여금 그 항해가운데 한 몸 같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는 베드로가 배 왼쪽 방향으로 요한 배 오른 쪽 방향으로 노를 젖기를 바라지 않으셨고 모두가 동일한 마음으로 바다 저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셨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면 제자들이 이 지휘관 예수님의 정신을 잘 파악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서로 다투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항해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한 폭풍이 몰아 쳤을 때 그들은 합심으로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합심으로 그의 능력에 놀랐다. 정말 그들은 평화시든 혼란시기든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 전쟁의 중요한 정신, 공동체의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 « passons » 의 두번 째 의미가 있는 바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 사이에서만의 공동체적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공동체적인 믿음을 갖기를 원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 passons » 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실제로 « 먼저 가려무나 »라든지 « 잘 가라 다음에 보자 »라든지 하지 않고 « 내가 너희들과 같이 가겠다, 자 같은 배를 타고 가자 » 라고 이야기 했다. 이 동행의 약속은 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가 우리의 각자와 같이 하겠다고 이야기 하셨다. 제자들에 관하여는 다음 절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그 배 안으로 그를 모셨다 » 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배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존재의 증거가 그들의 마음 속에 충분이 뚜렷하여 언제든지 그의 동행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광풍이 일어났고 파도가 그 배 안에 몰아쳐 배는 이미 물이 가득차게 되었다. 이제 배는 가라않고 있는 중이다, 하고 그들은 외쳤다. 이것은 그들의 뇌리에 스친 첫 생각인데, 그것은 익사한다였다. 틀림없이 익사할 것이다. 노련한 항해자로서 그들은 이 광풍으로 인해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합심하여 물을 퍼내기 시작했지만 헛수고였다. 물은 점점 차고 그들은 완전히 절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 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였나 ?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셨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와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의 얼굴과 흡사하였다. 예수님은 파괴적인 천재지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실 수 있으신 분이다.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세상의 끝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별 걱정이 없으셨다. 그는 마치 이 광풍의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셨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평화는 제자들을 화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속삭였다. 그가 우리가 망하게되는 이 급박한 상황가운데 웃는다는 것은 얼마나 굴욕이며 모욕인가 ? 그래서 이 불평이 가득한 단어들이 틔어나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야기 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이것은 그들이 그동안 억압하여 온 마음의 쓴뿌리들의 폭발이었다. 그들은 모든 노력과 수고를 들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것들에 대해 전혀 무관심해 보였다.
오늘날 파리의 거리에는 은퇴 제도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로 가두 시위가 심하다. 그런데 그들의 불평의 시위는 그 원인이 정부가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는 예수님이 마치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완전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일 때가 많다. 우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그는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교육의 어려움을 겪을 때, 그는 고물에서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일이나 양들에 관한 어려움이 있을 때, 그는 고물에서 베게를 배고 주무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불평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일종의 신음이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보다는 불평을 털어놓는 것이 좋다. 인간적 침묵은 불평보다 더 나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안의 감정을 전혀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죽게 생겼을 때, 내가 죽게 되었다고 이야기 해야 한다. 가라 앉을 때, 가라 앉는다고 이야기 해야 한다. 문제를 감추고 문제없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
사시기때 이스라엘에 나오미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기근으로 인해 그 가족은 도망하여 모압땅에 머물러야 했다. 그의 남편은 죽었고 그에 이어 두 아들도 하나 하나 죽었다. 이제 이국 땅에서 이런 불행을 당하는 것은 그에게는 그가 하나님으로 부터 잊혀짐을 당했기 때문이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가 이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게 되었다. 이제 이 곳에서의 모든 과거를 돌아볼 때 그 마음에 깊은 쓴 뿌리만이 남았다. 사람들이 그를 심방코자 왔을 때 그는 « 나를 이제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마라라 부르라. » 나오미는 매력적이란 뜻이고 마라는 « 씀 (amer)»이란 뜻이다. 이 요구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우리의 마지막 분석으로는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평임을 알수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를 버렸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 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대하여 친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동행을 확신하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과부 나오미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그를 끝까지 감당하셨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불평을 갖고 있기보다는 불평을 하여야 한다. 비록 그 불평의 말을 감당하는 것이 어려울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나는 만약 그 믿음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사람 앞에서 불평하는 것 보다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그의 인물들이 기도할 때 감사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번창하는 적에 대하여 끊임없이 불평하였다. 불평을 하여야 야단도 받지 않겠는가 ? 불평하고 야단맞고 그렇게 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서, 예수님은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심히 꾸짖어셨다. 39절 40절은 말한다. «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하셨다 그리고 «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라고 하셨다.
믿음의 반대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 네가 외 그런 죄를 지었느냐 »라든가 « 어떻게 그런 죄를 짖고 회개하지 않느냐 »라든지 절대 꾸짖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가운데 믿음이 없음은 심히 꾸짖어셨다. 예수님의 마음을 슬퍼게 하는 것은 우리는 믿음의 부족이다. 왜냐하면 이 부족은 두려움을 나타내고 이것은 우리가 그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낙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을 꾸짖으며 그는 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셨나 ? 예수님은 그들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하기를 원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광풍을 나무람으로 잠잠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그들이 바람을 위협하고 파도에게 명하여 그것들이 그들에게 복종하여 잠잠하게 만들기를 원하셨다.
바다에 관한 다른 하나의 에피소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의 눈을 맞추었을 때 바다위를 한 번은 걸어갈 수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동행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로하여금 물위를 걷게 하였다. 그는 예수님과의 공동체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부동산에서 방과 방 사이의 복도를 커무니케이션의 공간이라 부른다. 프랑스와 달리 미국에서는 한 회사의 방문을 항상 열어 놓는다. 이것은 그들 백성의 열린 정신을 반영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공동체적인 믿음을 가졌을 때 그와 예수와의 사이에는 아무 장벽이 없었다. 그는 자유롭게 예수님과 함께 교통할 수 있었고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능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공동체적인 믿음을 갖지 했을 때 두려움으로 사로잡히게 되었고 마치 세상 끝날 처럼 외쳤다. 그들은 1912년 티타닉의 침몰시 처럼 빙하의 물도 아니고 대양 한가운데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헤험 칠 수 도 있었고 한 나무 조각 위에서 떠 있을 수 도 있었는데 마치 세상 마지막인 것 처럼 구해주세요하고 외쳤다. 그들은 그들이 예수님이 배위에 계시다는 사고를 하지 않았을 때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이 어려움 앞에서 가감한 도전을 하기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있기를 원치 않고 그와 함께하는 공동체적인 믿음을 가짐으로서 저항하는 자연의 힘을 물리치기를 원하신다. 다른 한가지 예로 미국에서 상업적 계약을 체결할 때 구속에서 해방시키는 조항 다시말해 계약자 상방을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조건이 있는데 이를 « Actes of God » 라고 부른다. 이것은 저항할 수 없는 자연 재해로서 그 앞에서 아무도 무엇을 할 수 없는 경우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이 이 « Actes of God » 마저도 도전하여 퇴보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꾸짖을 줄 알아야 한다. 자연재해는 아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끔 우리 자신이 풍랑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악을 용납하지 못하면 풍랑이 일어난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큰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사탄은 사람안에 있는 이기주의 나 감정주의등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고자 전술을 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이 이 악앞에서 뒷걸음 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기를 원하시는 바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공간을 제공하면서 귀하게 쓰임받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꾸중하는 소리는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쨓든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들이 악을 꾸짖는 것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양심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양심이 우리에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있다. 확실한 불순종은 교정되어야 하고 그것을 꾸짖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지 못하면 꾸짖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 시대의 종교계의 위협앞에서 루터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는 95개 조항을 통하여 그들을 꾸짖었다. 다음의 이 종교 법정앞에서의 루터의 말은 매우 유명하다. 그의 믿음을 부인하라는 적의 말 앞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나는 그를 부인할수도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나의 양심에 반대하여 행위하는 것은 확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
2차 대전 이전 카톨릭이 나찌와 콘코르다를 체결하였을 때, 한 사람 디티디이 본 훼퍼는 이 독일 조상의 유산인 양심의 길을 따랐다. 그는 전쟁당시 전체주의의 핍박을 피해 왜국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로 돌아왔고 이 기독교 신앙에 반대된 이 체계를 향해 계속하여 « Non » 이라고 그가 이차 대전 말 조국의 배반자의 타이틀로 처형될 때까지 그의 위치를 밝혔다. 그는 악한 체계를 어떤 의미에서 꾸중한 것이다. 그앞에서 이 파도는 더욱 높아지는 것 같을 때, 그는 마침 이 폭풍을 그 고유한 의미로서의 폭풍을 잠잠케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앞에서 파도의 높아짐 앞에서 체념을 택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듯이 무엇보다 양심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서 우리는 네 네 아니오 아니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 승리의 날이 오고야 말것이다. 할렐루야 !
끝으로, 우리가 공동체적인 믿음을 예수님과 그리고 동역자간에 맺을 때 우리는 양심의 고소로 부터 해방될 수 있다. 만약 우리 어른 동역자들이 한 청년 동역자를 미워하면 양심은 계속 흔들리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름 사람들에게 너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캘빈에 의하면 비록 사람인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그리고 표면적으로나마 이 세상을 보며 한 신적존재를 느꼈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다. 그리고 그 대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유령들을 세운다.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한 우리는 그것을 극소화하거나 우리의 비뚤어진 판단으로 인해 파괴한다. « 삐뚤어진 판단 » 그것이다. 우리는 이 주범으로 인해 전쟁에서 지고 이 주범으로 인해 폭풍을 잠잠케할 수 없다.